[2014.07.30]WPO

2014.07.31 01:59

최한철 조회 수:241

1.
10년 전부터 나의 블로그를 방문해 준 사람들은 알겠지만, 초창기에 목표는 교육 재단이 아니었다. 블로그를 처음 개설하고 내 인생계획을 게시했던 19살 때는, WPO라는 세계 자선 기구를 만드는 것이 나의 꿈이자 목표이고 종착점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한 수단으로 헤지펀드 매니저가 되는 것을 정했고, 헤지펀드 매니저가 되는데 필수불가결한 미국 금융계 진입을 위해 일본, 중국, 미국을 아우르는 학업 계획을 세운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갔었다.

조금은 빈약한 동시에 너무나 그 규모가 커서 비현실적인 면이 있기도 하였으나, WPO라는 기구의 설립은 그 나름의 이상으로써의 역할은 했었다. 타인을 위해 산다면 나는 크게 보람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삶에 가치와 의미는 충분하다고 믿었다. 일본, 홍콩, 중국을 거칠 때까지만 해도 그 믿음에 흔들림은 없었다. 그러나 군대를 다녀오고 파병을 다녀오고, 미국 금융계에 입성하려고 기를 쓰고, 들어와서 온갖 갈등을 경험하며 겪은 큰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16세 때 혼자 켄사스에서 교환학생 홈스테이를 할 때 그 집에서 1년을 보낸 연이 닿아, 거의 나의 두번째 가족과 같은 관계가 되어 이제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앤더슨 가족이 있는데, 지금도 1년에 2-3일 정도는 켄사스를 방문하고는 한다. 언제나 방문하면 느끼곤 하는 것이지만, 뉴욕이나 시카고의 바쁜 삶에서 벗어나 켄사스에 도착한 첫날은 너무나도 평화롭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걱정이 없고, 텔레비전이나 스포츠를 관람하며 양껏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회사도 설렁설렁다니다 잘리면 좀 쉬다 다른 일을 찾아 보면 그만이다. 그러나 둘째날만 되면 그러한 켄사스가 너무나 지루하고 가슴이 답답해서 도저히 더 있을 수가 없다. 그곳은 변화가 없고 동기도 없고 자극도 없는, 유토피아와도 같이 평화롭고 모든 필요가 충족되면서도 그 밖을 경험한 사람은 도저히 더 있을래야 있을 수 없는 어떠한 완결된 세상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WPO라는 기구를 만들어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목적은 결국은 어떠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삶의 근원적 갈증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타자에 의거한 삶의 존재 이유 설명은 굉장히 편리하고 얼핏 설득력있는 발상이기는 하나, 결국은 그 대상의 존재 이유로 질문을 확장시킬 뿐이지 해답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즈음 해서 이러한 사고 과정에서 분명해진 것 한 가지는 있었다. 바로 우리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답할 수 없는 상태의 우리의 존재 이유는, 바로 그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함에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 키 높이의 수십 배에 달하는 거대한 우물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우물 밖의 세상이 어떠한지에 대해 아무리 논의하고 고민하고 사색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우물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그것은 나라는 개체가 아니어도 된다. 결국은 나라는 인간이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인류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되며, 이는 애초에 한 개인이 일생동안 풀어낼 수 있는 역량을 벗어나는 규모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체로서 이에 대해 접근하기보다는 유전자의 집단으로서, 종으로서의 접근법을 취함으로써 불멸성을 획득하고 그 질문에 대해 무한히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가 있다. 홀로 본인의 키의 수십 배에 달하는 우물 벽을 기어올라갈 수는 없다.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여럿이서 힘을 합쳐서 누군가를 계속해서 위로 끌어올려야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비롯한 우리 세대 - 아직 우주의 비밀의 1%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세대 - 의 사명은 계속해서 그 근원적인 질문을 갈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자라나는 세대를 그 질문으로 이끄는 것에도 있다. 수학, 철학, 과학 등 학문의 최첨단에서 인류를 진리에 조금 더 가깝게 만들어주는 전자의 길에서 이미 많이 벗어나 버린 나같은 사람에게 남은 후자의 길은, 결국 자라나는 세대가 본인의 자질과 천분에 맞게 본인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근원적인 질문을 풀려고 일생을 바치는 것보다, 근원적인 질문에 깊이 매진할 수 있는 다음 세대를 양성하고, 그리고 그 양성하는 시스템이 반영구적으로 지속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내가 한 개체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수년 간의 과정을 거쳐 나는 WPO라는 자선 기구대신 교육 재단과 학교를 설립하는 것으로 내 인생의 목표를 수정했다. 그러나 진정한 목적은 교육 재단과 학교 자체가 아니라, 이 기관이 반영구적으로 지속되며 낳을 22세기, 23세기의 결과에 있는 것이다.


2.
내가 설립하고자 하는 학교가 고아를 위한 학교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나도 이제까지 입증된 과학적 근거에 따라, 유전자가 사람 일생의 80% 이상을 결정한다는 것에 많이 동의하는 바이나, 나머지 20%의 후천적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있고, 이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가 불가능하게 되면 애초에 교육 기관의 존재 이유 자체가 희박해지며, 인류 역사의 흐름 자체에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들이 간섭할 여지가 없어진다.

둘째, 사회 전체적인 면에서 진보를 가속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구조는 기회의 평등과 이에 따른 결과의 공정한 차등이라고 생각한다. 좌파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불합리성을 역설하며 불평등을 열렬히 비판한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의 문제점은 기회의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에 따른 결과의 불평등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이지, 결과의 차등 자체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러 가지 감성적인 문구들과 일반 대중이 듣기 좋은 미사어구를 동원하여 기회의 평등이 아닌 결과의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세상은 앞서 말한 유토피아적인 완결된 세상에 다름아니며 이러한 세상에서 진보는 없다. 그런 맥락에서, 기회의 불평등의 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부모없는 고아들이다. 이들에게 양질의 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작게는 그들 개인들에게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고, 크게는 사회에 기회의 평등이 전파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자 한다.

셋째, 유전자로 인해 결정되는 부분을 제외한 후천적인 교육에 있어 어리면 어릴수록 그 영향이 지대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스크랩했던 카이스트 교수님의 인터뷰처럼, 12세까지가 흔히 말하는 '결정적인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고등학교나 대학교보다는 영유아때부터 이들을 내가 연구하고 정립한 커리큘럼과 철학에 따라서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원한다.

넷째, 이미 가정의 역할이 점점 더 축소되고 있지만, 점점 더 현대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언젠가는 부모 자식간의 역할도 사회가 대신할 날이 오리라고 생각한다. 대가족과 가문의 역할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이를 대신할 만한 사회적 인프라의 부재로 인해 초래한 비용을 생각하면, 언젠가 올 이러한 핵가족의 해체 과정에서 이를 대신할 만한 사회적 인프라를 미리 다져놓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학교의 모델은 그에 있어 굉장히 귀중한 선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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