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31]나의 부모님

2014.08.01 03:13

최한철 조회 수:272

내가 이렇게 해외 생활을 오래하고 별에 별 일도 다 겪고 빚도 수억씩 지면서도 멘탈이 무너지지 않고 그래도 안정감있게 살 수 있었던 건 사실상 모두 우리 부모님 덕분인데 일기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해 놓은 기록이 없는 것 같다.

언제나 우리 집을 생각하면 따뜻하고 안온한 느낌이 든다. 영남대학교 숲 속에 2층집인데, 언제나 외할머니는 정원에서 이것저것 소소하게 심으시고 산책하시고 어머니는 부지런하게 집안일 챙기고 아버지는 항상 서재에서 책을 들고 연구하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우리 부모님은 각자 너무나 다른 환경 -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 어머니는 엄청 부유층 - 에서 만나 옥신각신하면서도 각자 가정에 애정을 가지고 정말 열심히 집안을 이끌어 온 것 같다. 내가 영남대학교 병원에서 태어났을 때 우리 집은 대구에 그린맨션이라고 24평 남짓한 집이었던 걸로 안다. 워낙 애기 때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 3살 정도에 32평짜리 봉덕동 효성아파트로 이사했던 걸로 알고 있다. 거기서 9살까지 살다가, 대구 수성구에 49평짜리 에덴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서는 18살 때 영남대학교 근처 숲에 2층 주택을 지었고 거기서 줄곧 살고 있다. 평수가 무엇이 중요하랴 싶지만 24 > 32 > 49 > 전원주택의 변화는 유산없이 시작했던 아버지 어머니 부부가 그만큼 그 수십년간 성실하게 저축을 하고 삶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을 잘 보여주는 것들 중 하나다.

물론 부모님도 싸운 적도 많았지만 사소한 일들이었고 폭력없는 말다툼이었으며 언제나 싸운 이후에는 화해하고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바람 한 번 핀 적 없이 언제나 가정에 성실했고, 새벽 3시까지 연구하고 논문 쓰시는 모습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8할을 이룬다. 어머니는 시사, 경제, 상식에 관해 언제나 열심히 공부하고 자기계발하며 뇌과학까지 공부해서 우리를 어릴 적부터 그에 따라 키웠다. 아버지가 교환 교수로 갔던 두 번이 각각 내가 5세, 12세 때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4~6세 동안 뇌에서 언어 발음을 관장하는 부분이 형성되고 11~13세 동안 문법 구조를 담당하는 부분이 형성된다는 것을 안 어머니가 그렇게 스케줄을 맞춘 것이었다.

저녁이면 항상 가족끼리 모여서 과일을 깎아 먹고 티비를 보면서 하하호호 웃었다. 겨울이면 아버지가 군고구마를 사오시기도 했고 가족끼리 케이크같은 걸 사러 나갔다가 내가 번데기를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고등학교 이후로 나는 티비를 잘 안보게 되어 2층에서 할 일을 하고 있으면 1층에서 부모님과 누나가 집이 떠나도록 깔깔거리는 소리가 언제나 들려왔다. 그럴 때면 나는 씩씩거리면서 나 시험 준비하는데 조용하라고 핀잔을 주거나 슬그머니 가족 틈으로 파고들고는 했다.

부모님은 정말로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사소한 것에도 웃음이 많았다. 아버지는 항상 농담을 좋아하시고 어머니를 놀리기를 좋아했고, 어머니는 놀림받으며 화내다가도 이내 하하호호하며 거기 넘어가곤 하셨다.

주말이면 한달에 한두번은 경주나 동해로 가족끼리 차를 타고 놀러가서 회를 먹기도 하고 바닷바람도 쐬고 유적지도 돌고 등산도 하고는 했다.

어머니는 문화 생활을 굉장히 중요시하셨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8살 즈음이었나 유명한 세계적 화가들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리는데 당시 90년대에는 드문 일이었어서 어머니가 혼자 초등학생 둘 손을 잡아끌고 무궁화호를 4시간 타고 대구에서 서울까지 가서 또 지하철을 1시간 타고 구경을 하고 곧바로 대구행 열차를 타 밤늦게 당일로 집에 돌아온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그게 너무 싫고 미술 작품들 이해도 안되었지만 어머니의 자식 교육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새삼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공부를 강요한 적은 없었다. 부모님의 교육 철학은 어린애라고 뭘 모른다고 놔두면 안되고 어릴 때 교육을 철저히 시켜야 하며, 그게 잘 되기만 하면 사춘기 이후에는 내버려두고 본인의 결정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주의였다. 그래서 어릴 적엔 야단도 많이 맞고 잔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중학교 이후로 공부 열심히하라 잔소리를 한 적은 있어도 학원을 보내거나 뭔가를 강요받은 기억은 없다. 그리고 중학교를 넘어가면서 점점 나는 자유로워졌다. 고등학교에 갔을 때는 나를 완전한 성인으로 대해 주셨고 모든 결정에 있어 내게 가장 큰 결정권을 주셨다. 그 당시 학교에서의 격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일본으로 갈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이 크게 작용했다. 물론 어머니는 처음에 반대하시긴 하셨지만 그것은 강요가 아닌 조언이었다.

고등학교 이후로는 아버지와 둘이서 집 부근 산책을 많이 다녔다. 방학 때면 거의 매일 한 시간씩 걸으면서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들을 했고 많은 조언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얼마나 주옥같은 조언들이 많았는지 모른다. "네가 금융권에 가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테니 지금부터라도 취미 생활이라던가 그런 건전하게 스트레스르르 풀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둬야한다"라는 조언도 19세 때 들었던 조언이다. 10년이 지나서야 어리석은 아들은 그것을 몸소 체험하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만.

명절 때면 큰아버지 댁에 가면 아버지 4형제 식구들 수십명이 모여 재미있게 담소도 하고 제사를 드리고 밥도 먹고 놀았다. 나는 아버지도 막내고 나도 막내라 사촌형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 거리감이 있기는 했었다. 기억에 항상 남는 것은 언제나 밥을 먹을 때나 밥을 먹고 나서 삼촌분들 4형제를 비롯해 어른들이 교육이나 과학, 정치에 대해 이런 저런 토론을 하는 모습이었다. 큰아버지와 셋째 아버지는 보수적인 입장이었고 둘째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굉장히 리버럴했다. 아침에 제사가 끝나고 나면 옻골이라는, 최씨 집성촌으로 향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차남이셨고 그곳에는 첫째 할아버지의 자손들이 종가로서 있는데, 가면 사당에서 백명 가량이 제사를 드리고는 했다. 나는 거기서 완전 듣보잡이어서 항상 구석을 멤돌다 사촌형들이 데리고 갔고, 조금 크고 나서는 사촌 형들의 자식들, 내겐 오촌 조카들 애기들을 데리고 놀고는 했다.

주절주절 두서없이 내 기억에 나는대로 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지만, 얼마나 우리 부모님이 가정을 위해 수십년간 열심히 살아오셨는지 새삼 감사하다. 나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우리 부모님과 같은 가정을 꾸리는 것이 꿈이다. 그리고 내가 부모님께 받은 그 감사한 사랑을 나도 똑같이 나의 가정에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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