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26]서른

2014.08.27 04:44

최한철 조회 수:247

사실 나이란 임의로 숫자를 매겨 단절시켜 놓은 개념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서른이란 시점은 나도 모르게 자꾸만 의미부여를 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요즘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10년 전의 나와 본질적으로 얼마나 달라졌을까. 달라졌다면, 그건 긍정적인 방향일까 부정적인 방향일까.

한때는, 과거의 내 일기를 보고 삭제해 버리고 싶거나, 혹은 과거의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얼굴이 화끈거린다면 그것은 내가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반증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와 다시 고쳐 생각하자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내가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단지 남의 시선에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는 뜻은 아닐까 싶기도 한다.

과거의 일기를 들춰보면 놀랄만큼 죄의식이 도처에 내재되어 있는 것을 느끼곤 한다. 소년기, 청년기의 죄의식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별 것 아닌 일 - 사소한 거짓말이라던가, 머릿 속으로 음심을 품었다던가, 누군가에게 말로 상처를 주었다던가 - 에 깊은 양심을 가책을 받고, 이제 나는 더럽혀졌다는 생각을 갖고, 이 죄를 씻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곤 하던 나는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 소년기의 나는 슬프게도, 그러한 행동을 딱히 하지 않게 된 사람이 아니라, 하고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어딘가가 무디어진 사람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자극에 무디어지는 후각처럼, 반복되는 스트레스에 대한 방어기제로서 정신적인 감각 또한 무디어져온 것일까. 아니면,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 그러한 사소한 일들은 금방 합리화가 가능하도록 숙련이 되어버린 것일까.

나이가 들면서 정신과 인격을 도야하기보다 가면을 쓰는 것은 보다 손쉬운 선택이다. 그리고 그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서 이 블로그 또한 이용해 왔던 것은 아닐까. 해마다 연말이면 구구절절 적어내려가던 참회의 문장들도, 사실은 의도적으로 이용했던 건 아닐까. 본인이 지은 죄에 대해 남이 비난하기 전에 스스로 자책하는 사람은 섣불리 비난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비루하고 영악했다. 그럼에도 어쩌면 지금도, 이렇게 토로하는 나, 토로하는 척하고 싶은 나, 그리고 그것을 타자의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내가 공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립의 나이에, 가면이 너무나 오랜 기간 흡착되어 짓물러버린 살들 속에서 무엇이 가장 내밀한 나인지조차 구분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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