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25]시카고를 떠나며

2014.09.25 17:14

최한철 조회 수:328

저는 곧 트레이더로서 생활에 사표를 내고 시카고를 떠납니다. 입사할때 기세 좋게 3-5년 이후 아시아 지사를 만들어 가겠다는 진로는, 사내에서 정치적으로도 실패하고 트레이더로서도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여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한국행은, 벌써 몇 년째 미루고 있어서 이런 말하면 정말 몰염치하지만 몇 달만 더 미루기로 결정했습니다. 올해 드디어 한국에 4년만에 가는구나라고 너무 신나서 몇몇 분들께는 연락도 미리 했고, 만나뵐 리스트를 정리해보니 어림잡아 80-100분 정도 되었는데 이렇게 또 실없이 기대를 저버려서 송구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나마 지난 4년 못 뵌 동안의 근황과 못다한 이야기를 전하고, 양해를 구합니다.

저는 2011년부터,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화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매매를 하는, 마초적인 군대문화가 자리잡은 핏 트레이딩 위주 회사에 입사해 본사에서 주가지수 파생상품 트레이더로 3년을 조금 넘게 보냈습니다. 주위에서 모니터를 부수는 것은 다반사요, 일상이 브로커와 욕짓거리하는 것이고, 불과 며칠 만에 천억이 넘는 돈이 날아가는 모습도 목격했으며, 갓 30대 초반의 같은 그룹 선임 트레이더가 심장마비로 실려가는 것도 봤습니다. 이 곳이 말초 신경에 불을 켜고 욕망에 환장한 인간들만 모아 놓은 바닥인 건지, 아니면 돈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건지 몰라도, 소용돌이 속에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차분하게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그릇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 그릇이 되지 못하였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인지는 몰라도, 돌이켜보면 특히나 2011년 중반 입사부터 2012년 말까지의 저는 정말 철없고 어리석기 짝이 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매일 브로커와 욕짓거리를 하고 상사에게 욕짓거리를 듣고 후임에게 욕짓거리를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폭식을 하고 주말이면 항상 술에 취해 있었으며 술집에서 싸움을 하고 다치거나 필름이 끊겨 웃음거리가 된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10년 전 19살 대구외고 꼬꼬마 시절에는, "꼭 미국 금융계로 가고 펀드매니저가 되어 돈 많이 벌어 장학재단도 만들고 어린이들도 돕고 그래야지 ㅎㅎ" 라고 생각했던 저는, 농구 게임 도중 코트로 난입해서 방해하는 소년들에게 저리 안꺼지냐고 소리를 지르는, 매사에 공격적이고 다혈질적인 하잘 것 없는 20대 중반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적성을 따라 직업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직업에 따라 변하기도 하는 게 사람의 그릇과 성격이란 것을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건전한 가치관을 확립해야하는 시기에 분노하는 법만 배웠으며, 잘못을 저지를수록 거기에서 배우기보다는 본인에게 관대해지고 남에게는 엄격해져 가기만 했습니다.

얼마 전, 지난 3년간 잘린 동료 트레이더들을 하나하나 세어보다가 서른 명이 넘어가자 그만둔 적이 있습니다. 파생상품 트레이딩이란 것이 기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이라 내가 딴 만큼 누군가가 잃는 바닥인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단지 마켓에서뿐만 아니라 회사와 트레이더 사이의 관계도 제로섬이었고, 트레이더들 간의 관계도 제로섬의 관계였습니다. 회사는 백 명도 안되는 인원으로 해마다 수백억, 때로는 천억 단위로 순수익을 내면서도 각종 이유로 매년 20-30%의 인원을 주기적으로 잘라냈고, 내가 잘리던가 다른 누가 잘리던가하는 상황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딱히 회사가 너무하다고도 할 수가 없는 것이, 저 또한 저를 키워준 맞선임이 본인의 도덕적 실수로 위기에 놓였을 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고, 맞후임이 그룹에 도움이 되지 않자 가차없이 잘라내었으며, 저를 친히 뽑아준 시니어 트레이더가 사내 불륜으로 해고당할 때 인사조차 하지 않았고, 동기들의 해고를 발판삼고 몇몇 경쟁 상대를 견제하면서 추잡하게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동기 중에서 가장 먼저 트레이더가 되었고, 일년 반이 지나고 포지션 매니저가 되어 자리를 굳혀 나가면서 무의식적으로 '지금 이대로면 돼'라는, 진로에 관한 안도감이 아마도 일상 생활에서의 나태와 해이한 삶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에 큰 장애가 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제가 정신이 번쩍 든 계기도 2013년 많은 돈을 잃고 실제 해고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였습니다. 시민권도 영주권도 없이 취업비자로 일하고 있던 저는 해고를 당하면 4주내로 강제 출국을 해야했는데, 해고 자체에 대한 커리어면에서의 불안감보다는 빚의 문제가 더욱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저는 25살 때 부족한 인턴 경력을 만회하고 미국에서 트레이딩계에 취직하기 위한 승부수로, 소규모 투자 회사를 설립해서 등록하고 투자금을 받아 트레이딩을 했었습니다. 실패를 해도 그 경력 자체가 제 취업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진행을 했고 파산을 했습니다. 다행히 그 경력을 바탕으로 시민권도 영주권도 없고 인턴을 단 한번도 하지 못한 학부생 신분으로 취업에 성공하게 되었지만, 그 여파로 인해 금리 10~24%에 달하는 억대의 빚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크게 일을 벌려 놨는지 25세의 저의 멱살을 쥐고 싶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그 베팅이 성공하여, 투자 사업 실패라는 경력으로 가까스로 시카고 금융계에 취업을 하게 된 것 자체는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고, 주어진 것에 겸손히 감사하고 차근차근 갚아나갔다면 벌써 일이년 전에 한국의 보고 싶은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뵐 수 있었을 것입니다. 허나 사업 당시 대학생에 불과했던 제게 묻지도 않고 거금을 투자해준 투자자들에게 돈을 돌려 주어야한다는 강박관념과, 본전을 되찾고 싶은 알량한 마음과, 더 많이 벌고 싶다는 탐욕이 뒤엉켜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사업을 벌였고, 하는 족족 실패했으며, 그리하여 5년 가량 허공에 날려버린 총 누적 손실이 3억을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2013년 여름, 회사에서 위기를 맞아 해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어찌되었든 커리어면에서는 승승장구하고 있었기에 빚에 대해 고생은 조금 하더라도 이 나이에 그 정도 액수가 얼마나 인생에 파탄적일지에 대해 그렇게 깊게는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커리어 쪽에서 위기에 처하자, 이 빚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아무리 방책을 생각해 봐도 너무나 막막했고, 내 인생이 이렇게 끝장나는구나라는 불길한 생각을 밤마다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3년 반동안 얼굴조차 뵈지 못한 부모님께는 그 얼마나 큰 불효일지, 힘든 일을 별로 내색하는 성격이 아니라 빚 문제도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얼마나 충격일지 가늠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 마음이 참 오묘한 것이, 아들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바쁘신 와중에 시카고로 오셔서 저는 그때 입사 이후 처음으로 드디어 가족과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몇 년만에 부모님 얼굴을 뵈면서 정말로 큰 위안을 얻었고, 다시 정서적 안정을 찾고 중심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몇 년간 빚에 시달리며 경제적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부모님께서 얼마나 제게 안정되고, 행복하고 안온한 유년기를 베풀어주셨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제게, 건강과 가족만 있으면 나머지는 소소한 문제니 오지 않은 결과에 대해 미리 걱정하지 말고 하루하루 최선만 다하면 된다고 하셨고, 그에 따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회사로 돌아가 이런 저런 문제들에 차분히 대처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지난 후, 천신만고 끝에 제 주변 사람들 여덟 명이 모두 잘린 직후 마무리됨으로써 가까스로 살아 남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큰 위기를 겪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빚은 갚고 봐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실패하여 살아남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빈손으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있게, 더 이상 어떻게 일을 벌여서 한 방에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차근차근 절약하며 성실히 갚아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하늘이 저를 시험하는 것이었는지, 그 직후 기구하게도 5-6천만원에 달하는 사기 아닌 사기도 당하게 되었고, 다시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계속된 폭식과 폭음, 그리고 불면증 때문에 어느 덧 제대 직후보다 12kg까지 더 쪘던 살도 이 일이 있은 직후 3주 가량만에 거진 다 빠졌고, 살이 너무 급격히 빠져서 그런지 호흡 곤란 증세로 병원 신세도 세 번 정도 졌었습니다. 대인기피 증세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의미없고 귀찮기만 해서 한동안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고 회사-집만 반복하며 혼자 생활했습니다.

그러다 가까스로 멘탈을 다잡고, 정말 많이 아껴서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고3 때 일본행에 대한 집안과 학교의 반대에, 그럼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대신 경제적으로 독립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고 일본으로 가 한동안 100엔짜리 카레만 줄창 먹었던 시절보다 더 아껴살게 될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여러 수단을 통해 자금 조달도 시도한 끝에 드디어 올해, 2014년에 모든 빚을 청산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5년 간의 모든 과정에서, 언제나 힘이 되어주고 과거 사업을 벌일 당시에도 저에 대한 확신 하나로 계속해서 투자를 해 주었으며,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아무런 서류나 보증도 없이 덜컥 이제까지 저축해온 목돈을 송두리째 송금해 주기도 했던 오랜 지기이자 은인인 박중현 군에게 특별히 이름을 언급하여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빚은 어렵사리 청산했으나, 이미 회사에서는 2013년의 실패 이후 입지가 약화되어 아시아 지사 설립을 주도해서 간다는 생각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래도 트레이더로서 개인적으로 먹고 살기에는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는 미래는 있었지만, 애초에 이쪽으로 오게 된 계기였던 재단을 만들 정도의 포텐셜은 이미 사라진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식으로 해 나갈지를 한참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결국 초심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자꾸만 미래, 미래 생각만 하고 미래 계획만 짜다보니 현재 그릇에 분수가 넘치게 되어 초래한 꼴이 지난 수년 간의 빚잔치였다는 생각을 하였기에, 이제 생각은 그만두고 매일 성실히 출근이나 하자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자꾸만 위로 올라가고 싶고 욕심이 생길 때는 너무나 실패만 거듭되어 하늘이 왜 이렇게 나를 돕지 않는가라고 원망도 많이 했었는데, 오히려 욕심을 가라앉히고 분수를 넘는 일확천금성 무모한 도전과 본전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리고 차분히 새 시작을 하려고 마음을 먹자마자 보스턴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게 헤지펀드의 진로에 관해 관심이 있느냐는, 8년 전 홍콩중문대학에서 금융학을 공부할 때 은사님이셨던 교수님의 전화였습니다. 꿈많은 21살 시절, 수업이 끝나면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질문도 하고, 홍콩에서 중국까지 간 이후에 3학년에는 미국으로 가서 공부할 계획이고, 군대가면 파병도 가고 싶고, 졸업하고는 꼭 미국에서 헤지 펀드 매니저가 되어 내 재단을 만들겠다는 이야기까지 미주알고주알하던 그런 저를 8년동안 지켜봐 주시다 불러주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달음에 보스턴행 비행기를 끊고 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교수님과 교수님의 남편분 박사님께서 십수년간 연구해온 것을 토대로 헤지펀드를 설립할 것인데 본인은 본업이 교수이기에, 제가 헤지 펀드 매니저가 되어주지 않겠느냐는 정말로 과분한 제의를 받았고. 저는 그 자리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락을 했습니다. 두 번 생각할 이유조차 없었습니다. 저는 헤지 펀드에 직원으로 참여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기에, 다시 보스턴에서 시카고행 비행기를 타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리하여 그 이후 몇 달에 걸쳐 설립에 관한 법적 수속이 진행되었으며, 드디어 이제 몇 주 후면 그것이 완료되어 헤지 펀드가 출범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저는 많은 일이 있었던 3년 4개월 간의 시카고 생활을 끝내고 보스턴으로 떠납니다. 학부 시절 취업할 때 없어 그렇게 서러웠던 영주권도 받기로 했고, 지분도 과분하리만치 받았습니다. 비록 소규모 스타트업 단계이고, 헤지 펀드의 평균 수명이 3.5년인 것을 감안하면 이 또한 리스크가 있는 길이긴 하나, 19세 때부터 줄곧 직업적 목표로 삼아왔고, 최소한 30대 후반은 되어야 가능할 것 같던 헤지 펀드 매니저직이 갑작스럽게 주어진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느낍니다. 생각해보면 대구외고 시절부터, 일본 APU, 홍콩 중문대, 중국 칭화대, KCTC 대항군, 레바논 파병, 미국 뉴욕대, 시카고 트레이딩계, 그리고 이제 보스턴까지의 10년간, 나름 계획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면서도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많은 인복과 행운이 마법처럼 따라주었던 것 같습니다.

잘 될때는 너도나도 얻어 먹으러 오다 안 될때는 술 한잔 사주는 법이 드문 것이 각박한 세상의 이치인데, 제가 그렇게 안 되어 여유도 잃고 괴팍한 성미만 부릴 때 술 한잔 사주고 시카고까지 친히 찾아오기까지 하던 많은 벗들,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지인, 선배님, 은사님들께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의 말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한 분이 너무 많아, 혹여 한 분이라도 빠뜨릴까봐 차마 일일이 열거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심지어 빚에게까지 이제는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빚이 없었다면 아마도 저는 절대로 이렇게 4년 간 한국 땅을 밟지도 않으며 독하게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아마도 작년에 트레이딩을 포기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서, 이런 기회를 얻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보스턴으로 가면 아직 소자본으로 시작하는 단계라 한동안은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육 재단을 하겠답시고 하면서도 내심 나 개인적으로도 페라리도 몰고 싶다고 생각하던 과거 제 자신의 욕망이, 사실은 사회 초년생 새내기가 이룬 것이 없어 부족한 자존감을 채우기 위한 부질없고 알량한 허세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육 재단을 굳이, 실패 속에서도 끊임없이 2012년에도, 2013년에도 시작하려 시도하고 끈을 놓지 못했던 것 또한, 건전한 신념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방법론적인 타락을 합리화시켜줄 유일한 동아줄이었기 때문일지도, 품위를 잃지 않고 본인의 물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위선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는 차분히 한발짝 물러나, 펀드 수익금에서 제 지분만큼을 착실히 법인을 만들어 모으며, 그 기금이 일정 수준 모일 때까지 교육학 석사와 사회복지학 공부를 병행하며 조금 더 진정성 있게 접근할 계획입니다.

한국행은 원래 10월에 헤지 펀드를 시작하기 이전에, 8-9월에 걸쳐 6주 가량을 갔다오는 것으로 결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펀드 설립을 위한 법적 수속이 늦어지면서 연기가 되는 바람에, 현재 저 혼자 10월 중순부터 6주 정도 한국 돌아갔다가 12월에 교수님과 합류하는 방안과, 지금 바로 보스턴으로 가서 함께 펀드 운용을 시작하고 2월 구정 때 6주 한국 방문하는 방안, 그렇게 두 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헤지 펀드가 출범할 때 함께 시작하는 것이 좋고, 이직해서 비자 트랜스퍼가 진행되는 도중에 한국 방문했다가 미국 재입국이 힘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후자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들어 향수병도 굉장히 심해서, 펀드 설립 수속이 연기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너무 들떠서 올해 드디어 한국 갈 거라고 연락드린 분들께는 정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이제 두 번 다시 비자문제나 빚 때문에 귀국이 미뤄질 일은 없을 것이고, 보스턴으로 가면 휴가도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매년 주기적으로 방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일정은 2월 17일부터 3월 30일로 잡아 놓았습니다.

정말 다들 너무 그립고, 어서 빨리 뵙고 싶습니다. 너무 오랜 기간동안 수많은 분들을 뵙지 못하다 보니, 근황이라도 알려야겠다 싶어 시작한 글이 이리도 길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이 글의 길이가, 제가 지인분들을 얼마나 하루빨리 뵈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지 그 마음의 깊이라고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이, 20대 중반부터 서른을 목전에 둔 현재까지의 제 근황이자, 2012년에도, 2013년에도, 그리고 2014년에도 귀국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저의 장황한 변명입니다. 마지막으로 짐을 싸고 부치던 와중, 시카고 증권 거래소 앞을 지나며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150번의 서류 지원과 49번의 면접 끝에 드디어 첫 직장으로 출근을 했던 3년 전, 시카고 출근 거리의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도 이제 직장인이라는 사실이 정말 얼마나 감격스러웠었는지. 옹색했던 당시 저의 삶에 트레이더란 직함이 얼마나 오롯한 위안으로 다가왔었던지. 그리고 어찌하여 그로부터 천일이 넘게 쑥과 마늘만 잔뜩 집어 삼켰는데도 인간이 채 되지 못한 채 트레이더란 단어에 대해 자기혐오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지. 이십대 중반부터 세계 최대의 금융거래소에서 서른이 될 때까지 있으면서 그렇게 많은 돈을 만져봤는데도 몇푼없이 떠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내 너털웃음이 났습니다.

그 시원섭섭한 웃음 속에 쓰라림 또한 많이 섞여 있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그래도 제 나이 아직 스물 아홉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것보다 살아갈 날이 많으니, 지난 나날 동안 배우고 경험한 것을 교훈삼아, 앞으로 보스턴으로 가서 잘 되어도 자만하지 아니하고, 실패해도 담담하게 실력을 더욱 더 기르며 계속해서 도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훌륭한 헤지 펀드 매니저가 되어 제가 원하는 인생 목표인 학교 설립을 반드시 이루어 내겠습니다. (앞으로 25년 가량 걸쳐 진행할 교육 재단 및 학교 설립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제 블로그의 다음 링크에 있습니다. http://www.irealist.org/organization.htm )

그 꿈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행운을 마주하여 교만하지 않고 불운을 마주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며, 매 순간 겸허하고 성실한 자세로 사치하지 않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오는 구정 때 반드시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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