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01]시카고 생활의 끝

2014.11.02 12:13

최한철 조회 수:504

일주일동안 정말 정신이 없었다.
월요일에 사표를 냈다. 교수님께 전화를 받은 3월부터 줄곧 준비해오던 일이라 딱히 감흥은 없었다. 이 회사에서 쓰라린 기억도 많았지만 그래도 결국 외국인이었던 나를 고용해주고 여기까지 온 발판이 되어준 곳이라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보스와 사장에게 각각 감사의 뜻을 담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월요일에 뜻을 전했다. 굉장히 놀란 눈치였다. 그가 내게 말한 것이, 이제까지 입사이래 본 트레이더들은 단 한명도 빠짐없이 보너스인 1월과 7월 직후에 떠나갔다는 것이었다. 그 직전에는 회사가 많이 자르는 시기이지, 트레이더가 떠난 적은 없었다.

나도 사실 8월 정도에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본의아니게 헤지펀드 설립 절차가 늦어진 것도 있지만, 교수님이 보너스 받고 1월에 오라는 이야기를 거절한 이유는 왠지 그렇게 해선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올해 이제까지 번 것을 감안하면 연말 보너스가 10~15만불 되는데 어차피 절반은 7월에 받으니 1월에는 5~7만불, 거기에 세금을 제하면 최대 받을 수 있는 건 3~4만불이다. 그러나 그 정도 액수 때문에 헤지펀드에 늦게 참여하고, 원래 있던 회사에 나쁜 인상을 남기는 건 더 큰 손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앞으로 교육학 석사도 하고 헤지펀드 운영도 해서 그 수익으로 고아원 만들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미 포커 대회 때 우승 상금을 아동 병원에 기부했을 때부터 그런 꿈은 두 사람도 알고 있었기에, 격려의 말과 함께 행운을 빌어줬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목요일까지 나와 일해달라고 하였다. 보통 트레이더들이 그만두면 그 직후 트레이딩 룸에 진입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포지션 정보라던가 파일 등을 빼갈까봐 경계하는 것이다. 그런만큼 나에게 며칠 더 나와달라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신뢰의 표시이기도 했다. 덕분에 화, 수, 목 동안 온 회사 데스크를 돌며 수십 명의 트레이더들에게 전부 인사하고 축하와 격려를 받으며 떠날 수가 있었다. 시니어 트레이더와 파트너 몇몇은 추천서가 필요하면 써주겠다는 이야기까지 하였다. 가기 전에 데스크에 똥 싸고 가라고 농담하던 내 동기들과 가진 마지막 술자리에서, 우리 입사이래 좋게 퇴사하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정말 뿌듯했다. 3~4만불을 포기함으로써 장기적으로 훨씬 더 값진 것을 얻은 기분이었다.

목요일까지 일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스케줄이 많이 꼬여 짐을 부치고 사람 만나는 것에 많이 쫓긴 채 오헤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그런 과정에서 정욱이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7월말부터 떠나는 것이 계속 미뤄지면서 세 달간 정욱이 집에서 신세도 지고 각종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렇게 해 주기가 쉽지가 않은데 말이다. 정욱이는 MIT 졸업하고 시카고에서 마찬가지로 트레이더로 일하고 있는 동생이다. 이만큼 똑똑하고 인품 좋은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 의형제까지 맺은 사이다. 이런 인연을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시카고에서 나날이 헛되진 않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렇게 시카고에서의 3년 4개월은 막을 내렸다. 정말 힘든 일이 많았지만 결국 돌이켜보면 다 내 본인이 초래한 일들이었고, 그것을 헤쳐나가면서 정말 많은 교훈들을 배웠다. 이제 보스턴에서 30대를 시작한다. 오늘 문체가 정말 건조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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