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6.07]반성 - 선입견과 편견

2016.06.07 16:05

최한철 조회 수:163

나의 20대에 대해 내가 제일 후회하는 점 하나를 가지라면 아마도 선입견을 가졌던 일이 아닐까 싶다.



1. 


애초에 선입견이란 무엇일까. 

선입견, 혹은 선입관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적인 관념이나 관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선입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는 자연스러운 본능에서 기인한다. 어떤 대상을 분류하는 능력과 습득한 정보를 그 분류된 그룹에 적용하는 능력은 인간의 지적 진보에 중요한 기여를 해 왔다. 생물학적으로도, 지나간 유사한 상황에 대한 경험을 통해 눈앞에 닥친 상황에 대해 빠른 추론을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유리하다. 치타와 같이 생긴 동물을 볼 때마다 대상이 날 공격해 왔다면, 다음 번에 치타를 보게 될 때 선입견에 의해 저 치타는 날 공격할 것이라는 판단을 재빨리 내리고 도망친다. 즉,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피할 수 없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입견을 쌓게 된다. 할렘에서 흑인들에게 강도를 여러 번 당해 본 사람은 본능적으로 흑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게 되고, 사귀던 남친마다 바람이 나는 경험을 한 여자는 남자들은 다 바람둥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선입견은 개인 특유의 경험을 토대로 쌓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환경적 요인으로 생겨나기도 한다. 그 큰 요소는 부모다. 부모가 특정한 그룹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이를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그 부모의 선입견을 답습할 확률이 매우 높다. 아직 치타를 만나보지 못해봤지만, 부모 혹은 다른 이의 경험을 토대로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면 이는 생존에 유리하다. 사회적 요인도 한 몫한다. 공산주의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인 방송을 하는 사회에서 자란 사람은, 당연히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을 가지게 된다. 선입견은 결국 과거의 관찰한 결과, 혹은 대물림하여 습득한 정보를 토대로 어떤 대상에 대한 충분한 관찰 이전에 그를 판단하는 것이다. 즉, 예외를 염두에 두지 않는 통계적 추론이다. 이런 당연한 현상이 문제시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특정 집단이 가진 특성과 그 집단에 소속된 개인의 특성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특정 집단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해 개인이 온당치 못한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다. 선입견을 모든 새로운 대상에게도 적용하게 되면 그것은 곧 편견으로 직결된다. 서울 강남 학군의 학생들이 강원도 인제의 학생들보다 평균 성적이 높은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강원도 학생을 앞에 두고 공부 못하는 아이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 편부, 편모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임상적으로 애정 결핍 성향이 더 높게 나타나는 것이 실험에서 도출한 '객관적 측정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편부, 편모 가정에서 자란 사람을 앞에 두고, 이 사람은 애정 결핍이 있을 거야, 라고 단정지어버려서는 안 된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른들이 어떤 사람의 가정 환경에 따른 선입견을 말하는 것을 계속해서 들으면서 자라났다. 특정 직업을 가진 부모를 가진 자녀는, 그 부모가 지시하는 거에만 익숙하기 때문에 자발성과 융통성이 없다던가, 앞서 말한 편부, 편모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여유가 없다던가하는 말들을 종종 들으며 자라났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그 집단 당사자인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내게 편부모 가정에 대한 선입견을 말한 집안 어른은 당신 본인이 편모 가정에서 자라셨다. 그리고 교사에 대한 선입견을 말한 집안 어른은 당신 본인이 교사셨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선입견들을 그대로 답습했다.


통계적 추론은 유용하지만, 어디까지나 통계적인, 절대적이지 않은 사실만을 담고 있다. 따라서 어떤 집단의 통계적 성향에 대해 참고를 하면서도, 새로운 표본에 대해 100% 단정짓는 것은 피하는 것이 옳은 태도다. 대구 지방 사람들이 짠 음식을 먹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대구 사람에게 식사 대접을 할 때 무작정 짜게 만들기보다는, 그런 경향을 참고하지만 이 개인이 그렇지 않을 확률에 대해 열어둔 채로 소금을 별도로 준비해 두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나를 포함한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에 실패하는데, 그 이유는 1) 통계적 추론(선입견)에 따라 빠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 편리할 뿐더러 때때로 빠른 판단에 따른 이익을 가져다 주고, 2) 가능성을 열어두더라도, 선입견에 부합하는 표본이 몇 번 연속되다보면 그것이 머릿 속에서 굳어지기 때문이다. A국가 사람들은 도둑질을 많이 한다는 선입견에 따라서, A국민만 보면 무조건 물건을 조심하고 그를 상대하지 않으면, A국민에게 도둑질을 당할 상황이 아예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직한 A국민들이 당하는 부당함의 크기보다, 본인의 편리성과 이익 보존의 크기가 더 크기 때문에 그러한 선입견의 적극적 이용을 스스로 정당화하고 만다. 또한 비록 어떤 선입견이 항상 옳은 게 아니며, 그것이 틀릴 경우도 많다는 것을 주지하고 있더라도, 똑같은 상황이 몇 번 반복되다보면 어느새 그것이 고정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여기서 '똑같은 상황이 몇 번 반복되다보면'의 그 상황도, 선입견에 의해 특정 상황만 더 의식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잘생긴 남자는 바람필 확률이 높다는 선입견을 가진 여자의 경우, 실제로는 잘생긴 남자나 못생긴 남자나 그 확률이 비슷한데도, 잘생긴 남자가 바람피는 경우만 본인의 눈에 더 띄는 편향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특정 집단에 대한 선입견이 그 집단의 행동에 악순환을 만드는 경우이다. 첫번째 경우보다 이 부분이 더욱더 큰 문제인데, 이러한 악순환으로 인한 그 집단에 대한 편견의 피해자들의 행동이 오히려 가해자들의 태도를 정당화시키면서 더욱더 공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주토피아에서 표현하고자하는 주제도 여기에 있다. 여우들은 교활하다는 세상의 편견 때문에 닉 와일드는 어린 시절에 지속적인 상처를 입었고, 그것은 그를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악순환은 정말로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라도에 대한 편견과 지역차별이다. 전라도는 역사 대대로 심한 차별을 받아왔다. 현대사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전라도 차별은 조선시대를 거쳐 고려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 속에서 집권자들의 미움을 받은 것에 대한 나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대대로 전라도는 평야 지대로 곡창이고 먹을 것이 풍족했고, 유물사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곤궁함의 해결은 더 진일보된 의식과 연결된다. 사람이 의식주가 해결이 되면 사회 참여와 자아 실현을 원하게 되고, 그렇기에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시민 활동이 활발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그러한 경향은 당연히 지배계층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기에 역사 속의 차별과 핍박은 그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근현대사에서 장기화되면서, 전라도 사람들에게 집단적 트라우마를 남기면서 그로 인한 상흔이 또다시 차별의 근거가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적 약자는 첫번째로는 기회주의적일 수밖에 없고 두번째로는 동류끼리 뭉칠 수밖에 없다. 호남향우회처럼 전라도 사람들끼리 끈끈하게 뭉치는 것은 사회적 약자로서 당연한 현상인데, 이것은 또다시 이들을 차별하고자 하는 집단의 명분이 되어버린다. 


지역차별 외에 우리 사회에서 차별을 받고 있는 대표적 집단은 당연히 여성이다. 여성은 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경제적, 문화적 차별을 받고 있으며 이는 많은 수의 여성의 기회주의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된장녀'의 행동 패턴이나, 군 가산점 문제에서 보이는 여성의 '의무는 기피하고, 이득은 취하려는' 기회주의적 행동의 저변에는 그들이 오랜 기간 차별받아오며 사회적 약자로서 그렇게 행동하도록 유도된 컨택스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행동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지속하고, 성평등의 움직임을 저지하려는 집단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명분으로 사용된다.



2. 


이러한 선입견과 편견에 대해 내가 깊게 생각해 보게 되었던 계기는 이로 인해 한 친구를 잃게 되면서였다.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신상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내게는 어린 시절부터 아주 좋은 친구가 있었다. 그는 유년기의 상처가 있었기에, 나의 가정 환경에 대해 언제나 부러워했다. 그의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에게, 만날 때마다 '집에서 저녁먹을 때마다 A는 한철이의 환경이 그렇게 부럽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줄곧 하고는 하였다. 그런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듣기도 하고, 그에게서 그런 느낌을 직접 받기도 하였기에, 나는 그러한 부분에 대해 조심을 하면서 우정을 쌓았다. 선입견은 우리 집에서부터 먼저 시작되었다. 집안의 한 어른이 나에게, '그와 같이 편부모 가정에서 자란 애는 여유가 없고, 열등감의 극복을 위해서라면 정말로 독해질 수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좋을지 몰라도 너와 이익이 상충되는 경우가 있으면 네게 해를 끼칠 수 있으니 유념하라'는 말을 해 주었고, 나는 그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흘려 들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 친구의 출판물에, 이 블로그에 내가 썼던 글이 통째로 표절되어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책을 집필할 때, 나에게 '너 블로그에 글들 읽고 있는데 너 글 정말 잘 쓴다'라고 칭찬했었던 그의 행동, 그리고 출판하고 너무나 태연하게 내게 그 책을 선물하던 그의 행동에 의해 당시에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넘겨버렸지만, 아마도 균열은 거기서부터 조금씩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사회 전체에 지적재산권에 대한 개념이 희미하여 대학생들까지도 인터넷에서 짜깁기하여 레포트를 제출하던 그때 그 시절에, 아직 성숙하지 못한 학생 누구든 저지를 수 있는 실수였지만, 나는 그 위에 '역시 집안 어른 말이 옳았어'라는 선입견을 무의식 중에 덧칠했던 것 같다. 


인셉션에서, 사람의 무의식 깊은 곳에 아주 작은 개념 하나를 심어놓으면, 그것은 지속적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어느새 현실에 큰 영향을 준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와 이해관계가 상충하면 나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그 개념은 무의식 속에 아주 작은 싹을 틔웠고, 그 이후로 그가 학회 내의 자리를 놓고 다른 절친과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거나, 취직 후 나의 연봉을 꼬치꼬치 캐물어 보며 경쟁심을 드러냈을 때 조금씩 조금씩 양분을 먹으며 자라났다. 그러던 중, 내가 시카고의 어떤 거지 근성이 극심했던 부부 때문에 빡쳐서 쓴 글이었던 - [2013.09.05]질투, 열등감, 그리고 거지근성 - 을 쓰고 나서부터, 우리의 관계는 급격히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그 글에는 유년기의 사랑이 부족하면 저러한 경향이 강해진다는 내용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직전까지도 일상적인 대화를 했었는데도, 갑작스럽게 차가운 그의 반응을 보고서 이유가 무엇인지 한참을 찾다, 저 글의 내용을 그제서야 인식하고서 후회하게 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딱히 그를 의식하고 쓴 글도 아니어서, 사과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지만, 그것보다도 나도 이제는 지쳤다는 생각을 하였다. 기본적으로 본인 글의 일반적인 political correctness는 점검할 필요는 있지만, 그 범주를 넘어서서 내가 특별히 지속적으로 기분을 배려하고, 신경써야하는 관계는 건강한 관계가 아니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연의 마지막 연락은 우리 결혼식이었다. 청첩장을 보냈지만 그는 오지도, 결혼식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고, 그의 어머니만 결혼식에 찾아오셔서 둘러 보시고 가셨다. 그 직후, 그의 어머니는 나를 페이스북 친구에서 삭제해 버리시고, 우리 어머니와의 연락도 끊어버리셨다. 그는 이미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는데도, 실연을 하면 상대방이 본인 가정 환경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할 정도로 가정에 대해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그에게는 나의 결혼을 보고 있기 힘들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는 둘 사이의 우정이란게 내 쪽에서 과대평가되고 낭만화되어 왔다는 것도 깨달았고,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끝나게 되었다. 예전이라면 무리해서 다시 다가갔겠지만, 지금 든 생각은 오히려 그렇게 연락하는게 그에게 괴로움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의 두 문단은 지극히 나의 자기중심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내용이다. 이 글만 봐서는 마치 나는 그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아량 넓게 그를 친구로 포용하다가, 끝내 그가 속좁게 차가워져버린 것만 같다. 사실 저 두 문단은 예전에 블로그가 아닌 곳에 메모해두었던 생각인데, 시간이 지나서 그 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는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너무나도 일치하는 것에 놀랐다. 저 문단의 뉘앙스와 태도가 바로, 내가 절절히 후회하고 있는 20대의 내 자화상이며,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는 숱한 폭력에 다름아니다. 지극히 객관적인 척하면서, 사회적인 약자의 잘못을 은연 중에 드러내며, 그것을 통해 그에 대한 폭력과 비포용에 대한 명분을 세운다. 이는, 오히려 대놓고 하는 욕설보다도 더 잔인하고 악랄하다. 


저 문장에 내재된 사고방식들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피해의 생략이고 두번째는 주관적 시각에 씌인 객관성의 가면이다. 먼저, 저기에는 정말 제대로된 큰 그림을 설명해주는 많은 요소들이 생략되어 있다. 그가 경험했던 숱한 차별적인 시선, 그가 감내하고 극복해야했던 환경, 회한과 좌절감, 질투, 그리고 상처. 그리고 조금 더 특정하자면, 내가 그에게 했던 가해 사실은 모두 생략되어 있다. 과거의 내 글들에서 보이는 엘리티시즘과 고고한 자의식에 미루어 비추어 보면, 분명히 아무 생각없이 그에게 상처주는 말들을 했을 것이다. 불과 3년 전에 쓴, 저 질투와 열등감에 대한 글에서조차 '유년기의 사랑을 못받은 경우' 어떠하다는 이야기를 서술할 정도로 편견이 가득찬 인간이었다면, 그 이전은 얼마나 심했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더 문제가 되는 부분은, 그러한 가해 사실을 내가 고의로 생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것들이 가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 정말로 큰 문제이다. 그것을 포함하여, 그가 힘들게 보냈던 이십년에 달하는 어린 시절은 우리 관계의 문제에 있어 본질적일 뿐더러 그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인 가장 큰 이유인데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단순히 '유년기의 상처가 있고, 나의 가정 환경을 부러워했다'는 단순한 문장으로 끝을 낸다. (물론 나의 편을 조금은 들어주자면, 신상 보호를 위해 원 글보다 생략한 부분들도 많기는 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역겨운 것은, 저 문단들의 대부분이 지극히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일방적으로 나의 시각에서 서술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성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질투와 열등감에 대한 분석 글을 쓰고 나서 우리의 관계가 냉랭해졌다는 것은 나의 입장에서 서술한 것임에도, 냉랭해졌던 것 같다고 하기보다는 냉랭해졌다라는 확정 어투를 사용한다. 실제로는, '아마 그것이었지 않을까'라고 추측하는 정도에 불과하며, 나는 그것이 트리거 역할을 했는지 안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읽는 독자는 그것을 확정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고, 더욱 우스운 것은, 저런 식으로 글을 쓰다보면 어느새 글쓴이 자신의 내면 속에서도 그것을 기정 사실화해버린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이 개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자기 성찰로 지적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데, 이것이 집단 차원에서 일어나면 사회 전반적으로 고착화되는 강도가 매우 강해진다. 전라도, 성소수자, 여성 등의 약자에 대한 혐오를 일삼는 일간베스트라는 사이트가 위험한 이유는 바로 그에 있다. 단순히 여성에 대한 개인적 상처가 있는 남성은 그것이 무분별한 여성 혐오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일간베스트를 한다면, 끊임없이 올라오는 여성혐오글에 본인도 모르게 세뇌되게 된다. 왜냐하면 타인들이 서로서로 자기확인을 시켜주며,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의 여지를 없애버리기 떄문이다.


위의 두 문단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을 순차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근본적으로 피해자가 입은 피해는 단순화되고 축약된다. 

= A의 유년기에 대한 단순화 및 축약.

= 전라도에 대한 수탈과 통일 신라 시대의 백제 지역 차별의 피해에 대한 단순화와 축약.

2. 전체적인 문제의 최초의 계기에 대해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이 단계를 위해서는 1단계의 축약이 필수적이다.

= 나는 A의 부러움을 주지하고 배려하며 교제했다는 말, 즉, 나는 배려했음에도 그가 먼저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요지로 이어진다.

= 전라도에 대한 차별에 대한 언급없이 피해의식만을 언급하여, 그들이 과민 반응하는 것임을 강조. 

3. 외부의 권위를 불러와 객관성을 강화한다.

= 집안 어른의 A에 대해 조심하라는 말.

= 태조 왕건 훈요십조, 이성계의 유언, 삼성 고 이병철 회장 유언 등에서 나오는 '전라도는 배역의 땅, 중용하지 말라'는 인용 (심지어 이는 대부분 왜곡이다)

4. 피해자의 단편적인 잘못을 강조한다.

= A의 표절, 연봉 질문, 결혼식.

= 신안 섬노예 사건 등 전라도의 강력 범죄를 강조.


실질적인 순환은 아래와 같은데,

[대상에 대한 편견 > 그로 인한 대상의 극심한 피해 > 사회의 편견에 대한 대상의 반발 행동 > 반발 행동을 명분으로 대상에 대한 비난]

우리 사회에서는 처음 두 단계는 기득권과 미디어에 의해 생략된 채 아래의 악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상에 대한 편견 > 그로 인한 대상의 극심한 피해 > 사회의 편견에 대한 대상의 반발 행동 > 반발 행동을 명분으로 대상에 대한 비난 > 대상에 대한 편견 강화 > 처음으로 반복]


그러면 왜 이러한 과정이 손쉽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내 생각에는 아마도 수의 논리에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대상에 대한 사회의 편견은, 그것을 행하는 다수에게는 작은 것이지만 그 피해를 받는 대상에게는 매우 크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자들이 성소수자에게 주는 상처가 개인간의 일대일 관계에서는 1이라는 미미한 상처라고 하자. 그러나 그런 혐오자들이 많은 사회에서는, 백 명의 혐오자가 한 명의 소수자에게 1씩의 피해를 주게 된다. 1을 가한 가해자는 그 가해에 대해 쉽게 잊어버리지만, 백 명에게 1씩, 총 100의 피해를 입은 소수자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다. A와 나의 관계도 그러했다. 내가 그에게 행한 가해는 1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생각조차 나지 않으며, 설사 생각이 난다하더라도 그것은 그 특정한 사건만 놓고 보면 1 정도로 미미해서, '설마 그것가지고'와 같은 맥락에서 그가 옹졸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1씩, 수백의 피해를 받으며 낙담하고 있었을 것이고, 내가 그의 진정한 친구라면 그의 생각을 배려해서 유년기 운운하는 글은 아무리 그를 타겟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페북같은 오픈된 공간에 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30명이 있는 학급에서, C라는 아이가 D라는 아이보고, '바보야 저리가'라고 하는 건 딱히 문제될 게 없어보인다. 그러나 29명의 아이가 D가 다가갈 때마다 '바보야 저리가'라고 하는 건 따돌림을 시키는 것이며, D가 받을 정신적 스트레스와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야기할 정서적 문제는 극심하다. 그러던 D가 드디어 한계에 도달해, 그 날 '바보야 저리가'라고 했던 E라는 아이에게 죽일 듯이 달려들어 두들겨 팬다고 하자. 그러면 그 상황에서 아이들은, '바보야 저리가' 한 마디를 했다고 난리를 치는 그를 사이코라고 생각하고 더욱더 피할 것이다. 다수가 가하는 피해는 개별적인 가해자들의 뇌리 속에 쉽게 잊혀지지만 소수의 피해자의 뇌리 속에는 그것이 큰 폭력으로 축적된다.



3.


최근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인해 여혐 논쟁이 뜨겁다. 어깨 때문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남자인 물리치료사가 치료 중에 내게 강남역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하자, 그는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고 가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요즘 여자들 정신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러면 몇몇 여성들의 기회주의적인 행동으로, 전체 집단을 된장녀, 김치녀라고 비하하는 것은 용인되는건가. 앞서 말한 악순환과 너무나 같은 패턴이다. 뿌리깊은 남녀차별과 성폭력이 만연한 일상에서, 여성들 일부가 기회주의적으로 변하는 것은 약자로서 당연한 귀결인데, 그 기회주의적 행동 자체만을 강조하며 전체적인 컨택스트는 무시하고 집단 전체를 매도한다. 그러나 최근에 일베로 대표되는 여혐 현상에는 위에서 말한 단순한 악순환과는 또다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2012년 대선 전후로 일간베스트라는 사이트가 화제가 되면서, 나도 자주 들어가 눈팅을 하였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그 사이트 이용자들의 특징을 추려보면, 1) 사회적 약자 - 여성, 전라도, 장애인, 성소수자 - 에 대한 비하와 혐오가 여과가 없이 심하고, 2) 주로 2, 30대 남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때 소수였던 그들이, 지금처럼 거대 사이트로 확대되면서 그들의 코드였던 약자 혐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모습이다. 과거에는 정말 생각없는 사람들이나 일삼던 약자 혐오를, 어째서 그 많은 2, 30대 남성들이 집단으로 일삼게 되었을까? 


누나는 내게, 여성 혐오가 대중적으로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되는 분야 중 하나는 힙합이라고 하였다. 1970년대 뉴욕 근교에서 강제 집단 이주된 흑인 촌에서 발생한 음악이 힙합의 시초이며, 이들의 가사에는 이때부터 'slut, whore, bitch' 등 여성에 대한 입에 담기 힘든 욕들이 횡행했다. 이미 약자인 어떠한 집단의 사회적 위상이 더욱더 악화될 때, 그 집단은 상위 집단보다는 동급 혹은 약간 아래 계층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선임에게 극심하게 갈굼을 받았던 후임일수록, 본인의 후임이 개념없는 행동을 하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분노한다. 조승희 사건이 터졌을 때 미국의 많은 한인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멸시와 조롱을 받는 일이 빈번했는데, 그런 멸시와 조롱의 주 가해자는 조승희 사건의 피해자 대부분을 구성했던 백인들이 아닌, 흑인이나 중국인 등의 유색 인종들이었다. 이 또한 힙합의 예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약자 계층 간의 밀어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여혐 논쟁이 벌어지기 전, 한국 사회에서의 큰 이슈는 흙수저, 금수저 논쟁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타고난 가정에 따라 계층 간 유동성이 점점 더 사라져가는 사회를 비관하는 용어다. 경제는 점점 더뎌지는 저성장 시대로 가고 있고, 기득권은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으며, 청년 실업은 최대치를 가고 있고, 집값은 월급에 비해 지나치게 비싸며, 노인 부양 인구는 점점 늘고 있고, 내 집 마련의 꿈은 물건너 간지 오래다. 희망이라도 있으면 참고 버티겠는데, 현재의 한국에서 2, 30대에게는 그 희망조차 없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가능성 자체가, 요모조모 뜯어봐도 전혀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전같으면 남성보다 하위 계층이었던 여성들의 경제력이 올라가고, 이들에 의한 성평등 목소리가 커지면서, 현재의 2, 30대, 특히 경제적 상위 계층에 속하지 못하는 남성들은 아래 위로 샌드위치가 된 격이다. 위를 향한 분노는 땅콩 회항 사건 등의 갑질에 대한 문제 제기로 표출되고, 아래를 향한 분노는 약자혐오라는 현상을 야기한다. 그러나 문제는 전자는 정당한 것인 반면 후자는 부당하다는데 있고, 전자는 특정적이지만 후자는 광범위하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에는 미디어와 인터넷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별개로 또 하나의 큰 혐오를 언급하자면 동성애에 대한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회가 도대체 얼마나 폭력적인 사회인지,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는다. 나도 한때 동성애혐오자였는데,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다음에 따로 쓰려고 한다.



4.


결론적으로 나는 나의 무감각함 속에서 행해지던 타인에 대한 폭력을 반성한다. 스물 한 살 때의 나는, '동성애는 정신병이며 치료받아야 한다. 동성애에 대한 존중은 그 치료의 개발을 늦추는 장애일 뿐이다'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중국인과 일본인에 대한 편견, 동남아인에 대한 편견도 가지고 있었다.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안정된 직장'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멸시했고, 지잡대라는 비하적인 용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했다. 말로는 성평등을 지향한다면서, 행동으로는 이를 실천하지 못했다. 대구의 보수적인 문화, 엘리티시즘, 높은 자의식이 결합된 부작용으로 역겨운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자선 사업, 교육 재단을 운운했다. 세상 어디에 나같은 위선자가 또 있을까.


30대의 목표 중 하나는, 이러한 선입견을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완전히 떨쳐 내는 것이다. 되는대로 붙인 용어지만, 수평적인 선입견은 위에서 말한, 각기 개별성을 가진 대상들을 그 집단의 특성으로 판단하는 것이고, 수직적 선입견은 어떤 대상을 시간축으로 나눈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친구가 5년 전에 큰 잘못을 하였더라도, 2년 전의 그와 현재의 그는 5년 전의 그와는 별개의 존재로 판단하여 주홍글씨를 찍지 않겠다는 뜻이다. 불과 1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내가 많이 다르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과거의 미숙했던 내가 너무도 부끄럽고, 내 행동에 대해 후회하며, 당시에 나를 알던 사람들이 내가 성숙해졌음을 알아주기를 원한다면, 나 또한 타인의 변화와 성숙 가능성에 대해 관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물론 벌써부터,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은 실감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사물과 대상을 군집화하여 분류하고, 집단별 경험에 통계적 추론을 적용하여 특성을 기억해두는 일은 인간으로서 중요한 생존 전략이자 본능이기에, 선입견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 속에 생산이 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매일 노력하며, 하루하루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내가 진정으로 나중에 좋은 일을 하고 싶다면 이 과정은 반드시 거쳐가야만 하는 과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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