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14]학벌주의

2007.12.15 11:01

최한철 조회 수:348

수능등급제가 시행되면서 여러 논의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학벌 타파가 아닐까 싶다. 대학 서열화 해체, 현 정권이 원하는 바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나 허황되고 뜬구름 같은 소리인지 모른다.

어느 사회에서나, 특히나 자본주의 그리고 능력주의 사회에서 뛰어난 인재를 분별하는 메커니즘은 반드시 필요하다. 현 메커니즘이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대안없이 단지 부수고 보자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비판받아야 할것은 '학벌을 획득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공정성과, 그리고 학벌과 실제능력사이의 괴리라던가, 인재의 분별에 있어서 학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비대하다는 점 등이지, 학벌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단지 비판만을 위한 비판일 뿐이 아닐까?

자본주의 또한 비판받을 점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나마 사회적 시스템 중에 최적의 대안은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해 정부가 시장실패에 부분적으로 개입하는, 즉 '틀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방법이라는 건 역사가 증명해 준 바 있다. 순수 자본주의가 비판받을 점이 있다 해서 현 자본주의 체제를 붕괴시키자는 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듯이, 학벌로 대표되는 능력주의가 비판받을 점이 많다고 해서 타파하자는 건 어불성설이다.

정말로 학벌주의와 대학 서열화가 문제일까?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대학의 서열을 없애고 일률적으로 균등히 만들었을때, 그에 따른 부작용은 없을까?

대학의 존재의의가 무엇일까? 인격체로서 기본적으로 가져야할 교양과 전공지식을 쌓는 교육 기관이라는 고상한 정의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고, 간단히 말해서 고교까지 '의무 교육'을 마친 청소년들을 성인이 되어 사회에 진출하기 전까지 준비시키는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교-대학-사회(취업)으로 이어지는 큰 그림을 원만하게 이어주는 퍼즐 중의 한 조각이다. 그 연속성을 토대로 큰 그림을 볼때, 이어진 퍼즐중 하나인 대학만의 서열화를 타파하면 불가피하게 경계사이에 온갖 잡음 및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대학의 학벌에 관한 논의를 하기 위해선 그 전 단계인 고교부문에서의 논의와, 그 후 단계인 사회부문에서의 논의를 빼놓을 수가 없다. 현재의 고교-대학-사회 시스템은 철저히 학벌주의에 맞춰져 있다. 고교에서는 내신을 통해 경쟁하고 수능으로 학생간 순위를 매긴다. 철저하게 '누가 좋은 학벌을 가지느냐'에 관한 경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학벌이 기업의 채용기준은 물론이고 인재의 평가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학벌을 타파하려면 이에 맞춰 학벌위주의 고교시스템도 바꿔야 하고 학벌위주의 사회시스템도 바꿔야 한다.

고교면에서는 이미 현 정권이 충실히 그 작업을 진행 중이다. 고교평준화를 통해 일차적으로 고교간 줄세우기를 없애고, 내신 비중을 확대해 그것을 강화하고, 본고사를 금지하여 대학자율적으로 최적의 인재를 찾는 것을 막은 채 자신들의 로드맵을 따르도록 못을 박아두고, 마지막 결정타인 수능등급제(사실 수능자체를 없애는 게 그들의 이상일지도 모르겠다)로 학생간 서열화를 흐려 놓는다. 뛰어난 인재를 자기 대학에 넣고 싶은 대학측의 소망에는 역행하지만 '학벌타파'와 대학서열화 폐지에 이만큼 일관되게 적합한 정책은 없다. 이제 고교면에서는 줄세우기가 사라지고 대학 서열화가 사라지는 방향으로 일단 자세는 잡았다. 덕분에 고교생들의 전반적 학업수준의 하향평준화는 되었긴 하지만. 현 정권은 자신들의 알량한 평등의 이상을 이룰 수 있다면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다.

고교에서의 줄세우기를 막고, 대학의 줄세우기를 막으면, 그 다음 차례는 자연스레 사회가 된다. '줄세우기'라는 메커니즘을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고교->대학에선 '수능'이겠고 대학->사회에선 '학벌'이 될 것이다.(물론 학벌만은 아니겠지만) 가장 대학졸업생이 걷는 가장 일반적인 진로는 취업이다. 자, 그럼 기업 인사 담당자가 전국 수백 수천개의 일괄적으로 서열화 폐지되고 동일한 대학을 마주보고 있다고 해 보자. 그건 마치 대학 입학 담당자가 수능이란 잣대없이 똑똑한 고등학생을 자기대학에 선별하여 넣는 작업만큼 힘들고, 여러 가지 많은 비용이 들 것이다.

흔히 국내에서 기업을 '줄 세워'놓았을때 취업 준비생들의 리스트 최상위권에 속하는 대기업들인, 삼성이나 LG가 채용 공고를 낸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지원할까? 대학 서열화가 폐지된 상황에서 수만명, 수십만명, 아니 수백만명이 될지도 모른다. (수능이 없고 내신도 순위 없이 단지 수우미양가로만 평가하는 고교 시스템에서 서울대에 올 수를 받은 모든 학생들이 너도나도 지원하는 양상이라면 대학측은 십수만장의 논술 채점을 해야할지도 모른다) 기존의 시스템에서 학벌이 최소한의 타겟팅 지원자 풀을 어느정도 한정시켜준다고 보면, 이러한 기능이 사라진 평등 대학 사회에서는 기업이 인재 채용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까? 학점으로 인재를 뽑을까? 그건 마치 현 입시 제도에서 내신 100%만으로 대학 가자는, 지극히 부조리한 발상이다. 그러면 남은 건 경력 및 수상실적, 인턴십 등의 재량적인 부문밖에 없다. 이러한 요소들을 수십만명의 지원자를 일일이 대조하면서 인재를 발굴할 수 있을까? 최소한 수천명으로 지원자 그룹을 축소하는 뭔가가 있어야 될 것이고 그 기능을 하는 것이 현재의 학벌이다.

백번 양보해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자. 아무리 비효율적이라도 가능은 할 것이다. 그러면 사회는? 사회도 평준화 해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그들의 논리라면 애초에 기업간에 서열이 있는 것 자체도 문제니까. 그래서 이번 모 대선후보도 기존 정당의 행보에 맞춰 공약을 걸었더라. 대기업을 없애고 수만개의 중소기업으로 대체하겠다고. 이즈음에서 한번 크게 웃으면 된다.

요컨대, 학벌타파의 가장 큰 딜레마는 현재 대학만이 서열이 있는 것이 아니고, 기업들에도 서열이 있다는 것이다. 기업간의 서열화를 타파하지 않는 한, 대학 서열화는 허황된 망상일 뿐이다.

인구 5만명의 소도시가 있다. 거기서 달리기 대회가 열렸는데 1차 예선에서 5만명중에 1천명이 통과하고, 2차 예선에서 100명이 통과하고 마지막 본선이 있다. 1차 예선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던 시민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숨차며 힘든 이유가 달리기 대회에서 순위가 결정되어지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경기 방식을 바꾸어 주자간의 서열화를 없애 버렸다. 1차 예선에서 모두가 통과했다. 2차 예선도 마찬가지로 모두가 통과했다. 그러나 본선에 이르자 상금은 1, 2, 3등에 한정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고 2차예선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미친듯이 본선을 향해 서로 5만명이 뒤죽박죽 엉겨 뛰어 간다. 수만명이 뒤섞여 달리는 가운데 심판도 그 무리와 흙안개속에 뒤얽혀 누가 1등인지, 누가 100등인지 구분도 못하고 결국 대회는 실패로 끝나 버린다.

고교에서의 평준화와, 대학에서의 평준화가 진행되었을 때를 비유해 적어 보았다. 사교육 조장하는 입시가 나쁘고 힘들고 청소년 인성에 악영향을 끼치니 평준화 해버리고, 학벌도 부정적이니 없애버리고, 모두가 평준화된 대학을 다니는 것까진 가능하다. 그러나 졸업하는 순간 그들에게 펼쳐진건 최소한의 구분도 없는 아수라장일 것이다. 기업마저 평준화하여 어느 기업을 들어가건 상관이 없는 사회를 이룩한다면 모르겠지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할 뿐더러 국제화 시대에 자국 경쟁력만 죽이는 방향이다.

결론은 단순하다. 자본주의가 비판할 거리가 많고 이상적이지 않지만 그나마 현실적으로 최선의 대안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올바른 방법을 모색해야 하듯이, 학벌주의도 비판할 거리가 수없이 있지만 학벌주의 자체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올바른 실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학벌과 능력간의 괴리를 없애서 정말로 똑똑하고 참된 학생이 좋은 학벌을 가지는 것을 신경쓰고, 학벌이 인재의 역량을 평가하는데 지나치게 큰 비중을 가지는게 아닌, 여러 기준 중 하나가 되도록 하는데에 신경써서, 학벌이 객관적이고 올바른 능력평가 잣대가 되도록 이끌어야 하지, 학벌 자체를 없애버려서는 사회적 비용과 잡음만 늘어날 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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