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28]아귀지옥

2018.09.29 04:08

최한철 조회 수:82

지난 번에 내 실명을 허락없이 본인의 책에 실은 저자가 미국에 번역본을 출판한다고 하여 내 실명을 빼달라고 했다. 


나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과 관계하기가 싫다. 

업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통할지 몰라도 업계에 있어본 사람이라면 무엇이 부정직한지 안 보일래야 안 보일 수가 없다. 

게다가, 저자가 다녔던 회사마다 내 업계 지인들이 있기 때문에 사실확인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도 내 블로그를 간혹 들어온다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미국 트레이딩 업계에 몇 년 있다가 본인의 헤지 펀드를 시도한 점도 같고, 블로그라는 공감대도 있고, 받았던 투자가 무산된 부분도 같아서 내게 동질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게 언급없이 내 실명을 집어넣으면 내가 기뻐할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스턴과 홍콩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에 대해 유일하게 후회하지 않는 점은 스스로를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윗사람이 내부자거래를 제안했을 때 거절했고, 유흥업소에서 2차의 방 안으로 떠밀렸을 때 상대와 담담한 대화만 나누다 나왔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헤지펀드 매니저가 되었다는 것이 벅차서 세상을 향해 허세는 부렸을지라도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이르지는 않았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일러 그것에서 이득을 취한 일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완벽하게 티끌하나 없는 도덕적 삶을 살았느냐고 하면 당연히 아니다. 실수도 있었고 고뇌도 있었고 후회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의 끝에는 후일의 내게 경멸받지 않을 선택들을 했다.


그렇기에 두 번의 연이은 큰 실패 이후 나는 분노, 수치심, 모멸감, 후회, 우울감과 같은 감정들을 다채로이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애만은 간직할 수 있었다.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지난 5년이 후회되고, 앞으로의 상황을 생각하면 지난 12년이 후회된다."고 끄적이면서도, 후회되는 삶을 살아온 나, 바보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저지른 나, 한탄과 비탄에 빠진 나를 깊이 사랑했다. 자기애의 위대함은 실패의 낭만화를 통해 그것을 정신적인 양식으로 삼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 자기애가 원동력이 되어 와신상담의 2년을 보내게 해 주었고, 내 인생의 하이 워터마크를 까마득히 갱신하도록 해 주었다. 아마 이미 너무 멀리 나갔기에 들리지 않을 메아리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때 내 블로그의 독자였다는 얇디얇은 연으로 그나마 거의 없는 의리, 정, 측은지심까지 모두 짜내고 짜낸 한 방울로 해 주는 조언이다. 타인에게 거짓된 삶을 살다보면 어느 순간 가슴 속에 자기애가 한 방울 한 방울 사라져 갈 것이다. 가슴을 찌르는 죄책감과는 또 다른 성질의 그 현상은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내부에 스며든다. 


단순히 20대의 혈기에 본인 자랑과 허세를 부리는 것과, 본인에 대한 사실들을 위조하고 거짓부렁으로 타인에게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지옥의 일주문인지 모르고 자꾸만 걷다보면 어느새 영혼에서 구린내가 나기 시작한다. 정갈하지 못한 말을 자꾸만 입밖에 내어 들어오는 꿀에 도취되다보면 입에서 나는 구린내에 똥파리들이 꾀기 시작한다. 스스로가 사회의 머리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구린내나는 곳에는 항상 그런 풋내기보다 더한 산전수전을 겪은 각다귀들이 엉겨붙기 마련이다. 준법의식이 있는 일반 시민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자칫 한발짝만 옆으로 잘못 디디면 평행세계처럼 그곳에 아귀지옥이 있다. 


아귀란 무엇인가.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탐욕을 부려서 환생한 존재, 억겁의 시간을 고통받아야 다른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그 소설같은 정의에는 선현의 지혜가 담겨 있다. 그냥 욕구가 아닌 탐욕, 즉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게 되면 하루하루가 고통이라는 뜻이다. 본인의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면 욕심을 줄이거나 분수를 늘리는 방법밖에 없는데, 전자가 불가능해 보이니 후자, 즉 실력을 갈고 닦는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자기애는 아귀지옥에서 벗어나는 열쇠다. 어리석은 길에는 반드시 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락이 함께하는 법이고, 아귀들은 락은 제 탓, 고는 다른 아귀 탓을 하며 그 수렁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무한히 윤회한다. 자기애는 자기의 이기심을 위하는 보잘 것 없는 욕심이 아니라, 스스로가 처한 불행한 상황의 탓을 자신에게 돌려, 스스로 하심하고, 겸손하고, 자중하여 실력을 길러 그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용기'이다. 


스스로 자기애를 한줌 한줌 태워가는 그 어리석음의 끝에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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