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1]공허

2018.12.22 13:55

최한철 조회 수:59

"가끔은 정신없이 취하고 싶을 때가 있다"라는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어디선가 읽었다기보다는 굉장히 상투적인 구절이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그런 날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비가 오는 겨울날이었고, 데낄라를 사와서 정신없이 비웠다. 승욱이에게 카톡을 했다. 왜 혼술하냐고 묻는 승욱이에게 그저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고 농담조로 말했다. 


가끔 고개를 드는 것들이 있다. 삶이 안정되고 가족, 직장 무엇 하나 모자랄 것 없는데도 정말 드문드문 엄습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 알 수 없는 공허와 답답함을 이따금 마주한다. 이따금이 언제 한번이냐, 한다면 개월로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고 연수로 셀 수 있을 뿐이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콕 집어 말할 수 없으며, 애초에 내게 내재해 있던 게 아닌가하는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정신없이 마시고 정신없이 토했다. 그냥 이유를 알 수 없으며 정확히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취했고, 그 기분을 잊기 위해 술에 취했다. 그 사이 와이프와 딸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내가 살아온 날을 돌아본다. 모든 것이 한여름 밤의 꿈만 같고, 눈을 뜨면 대구외고 시절의 데이드리밍하던 나로 되돌아갈 것만 같다. 대구외고의 구름 사다리에서 보이던 풍경, 일본 캠퍼스의 맑은 공기와 숱한 별들, 그리고 백엔 온센, 홍콩 무더운 여름의 구불구불하던 계단들과 양차오 볶음밥, 칭화대 분수들 사이로 보이는 전경과 수많은 오리떼들, KCTC 전갈대대 시절 뱀꼬리처럼 이어진 길에서 봤던 별똥별들, 레바논의 도마뱀과 일교차 심한 밤 사각거리던 자갈소리들, 뉴욕대 밥스트 도서관의 펜스와 990 난간에서 보이던 맨하탄 풍경, 시카고의 춥디춥던 겨울과 시카고 미술관 뒤편 공터, 보스턴의 쌓인 눈밭과 비오던 날의 보도블럭들, 서울 삼청동 어느 한옥에서 마셨던 자몽차와 옆에서 들리던 불어 소리, 홍콩 센트럴 후덥지근한 해변의 페리와 펑차우 섬, 콜럼비아대 아이하우스의 라디에이터, 모든 것들을 차례차례 추억했다.


현재에 만족하면서도 때로 현재는 너무나 현실감이 지나쳐서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 지나친 현실감은 삶을 채우는 동시에 공허하게 만든다. 어긋나지 않는 현재는 추억삼지 못하는 고질병 때문인지, 온갖 불행을 무의식에서 상상하고 마는 것일까라는 자기의심에 빠지기도 한다. 얼마나 피곤한 인생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조차도 색을 칠하려는 가련한 시도가 아닌가 싶어 그만두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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