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9]일기와 부정적 감정

2018.12.29 17:21

최한철 조회 수:72

저번에 사기꾼으로 인해 분노한 것을 계기로 홍콩에서 있었던 일을 쓰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스팀이 약해진 것을 느낀다. 이런 나의 추이를 살펴보면서, 그리고 지난 십수년간 나의 일기의 간격을 돌아보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가 부정적 감정들을 주로 일기로 승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분노, 회한, 공허함, 원망, 괴로움, 피로와 같은 감정들이 내 일기들의 주연료였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는데, 그런 맥락에서 보면 가장 많은 일기를 가장 촘촘하고 두껍게 썼던 시기가 군시절이었던 것이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반면, 2002년 말부터 2018년까지의 기간 중 유일하게 반년씩이나 일기를 쓰지 않았던 시기가 있는데 그것은 2011년 상반기, 즉 시카고로 취업이 확정된 후 입사하기까지의 시기였다. 그 시기는 내가 학부 시절 일본, 홍콩, 북경, 뉴욕에 이르기까지 줄곧 목표로 하였던 미국 금융계 취직을 달성했다는 사실로 인해 극히 만족하고 방탕해져 있던 시기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똑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솔직히 지금 행복하다. 아린이 때문에 육체적으로 좀 피로한 것을 제외하면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다. 그렇기에 과거라면 분노하고 경멸했을 상대도, 그저 동정해 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현재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바깥 세상에 자신을 표현할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SNS를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은 가장 공허하고 불안한 사람이다. 내가 SNS를 했던 시기를 되돌아보면 그렇다. 일기를 쓰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무언가 채워지지 않거나, 무언가를 표출하지 않고서야 배기지 못할 때 적극적으로 글이 나온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그런 부분이 없다. 누구의 경청도 필요없고 누구의 인정도 필요없다. 다만 오롯이 있어도 무엇하나 아쉬울 것이 없다. 그래서 나를 외부에 표현할 동기도 없다. 굳이 일기를 쓰는 이유는 내가 살아온 삶을 기록하고자 하는 자기만족적 욕구밖에,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없다.


그래서 며칠 전 공허함에 술을 마신 일도, 사실은 공허한 것이 아니라 공허한 것이 없는 것에 대한 공허함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6년간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징징대면서도, 사실은 그렇게 쌓아가는 나의 시간들과 추억들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특별한 경험들이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기도록 해 주었고, 당면한 시간 속에서 자존감이 떨어지더라도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자기애는 무척이나 강건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어쩌면 20살 한국을 떠난 이후 13년 만에 처음으로, 당면한 시간 속에서 만족하며 안정된 행복을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해,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불안감은 다름아닌, 내 이야기가 완결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가라는 종류의 유치한 감정일 것이다. 과거에 이렇게, 안정된 행복이 완성되어가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나는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다시 급류를 타고 불나방처럼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아마 줄리앙 소렐을 사랑하기보다는 줄리앙 소렐의 떨어진 목을 감싸안고 오열하는 그 자신에 심취하고 싶어 나락으로 나아가는 마틸드의 소녀적인 감성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나이브한 유치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지켜야할 가정이 있는 나는 더이상 그러한 놀음을 되풀이 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2016년 9월 14일의 일기를 보면, 다음의 구절이 있다.

"작년부터 계속해서 어두운 생각들을 한다. 우울하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드라마틱한 사고, 사건, 고통 등에 대한 생각들이다. 그 생각들은 논리적인 순환을 따르지는 않고, 머릿 속의 잔상이라던가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나는 사람의 삶이 잠재의식에 많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그렇기에 긍정적인 생각만 하려고 하고, 그것이 지난 여러 일에 대처하고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었다. 그래서 그러한 생각이 들때면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한다. 그에 상응하는 밝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하면 할 수록, 뭉게뭉게 커져서 걷잡을 수 없게되어 잠 못 이루는 밤들이 많았다."


이제서야 돌아보건대, 불현듯 찾아오던 어두운 생각들은 내가 겪어온 사건사고들로 인한 상흔들이 아니었다. 단지 그것들을 과거의 풍파에 따른 상흔이라고, 따라서 나는 아직도 비극적인 스토리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하며 감상에 잠기고 싶었던 내 잠재의식의 철없는 발현이었을 뿐이었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 어두운 생각들은, 더 이상 비운의 주인공 노릇을 할 수 없게된 내 안의 소녀감성의 어설픈 몸부림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20대 시절 나는 매년, 그 전 해의 내 행동들을 돌아보며 나의 철없음에 대한 후회를 부르짖었다. 그것이 언젠가부터 뜸해지기 시작하여, 최근 몇년 간 그러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아마득하다. 과거에는 그 당시의 나와 1년 전의 내가 큰 차이가 있음을 느낄 때가 잦았는데, 2016년 말의 나는 2017년 말의 나와 크게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렇게 한동안 잊고 있었던 느낌을 오늘 문득 탁, 하고 느끼는데, 그것이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다. 아, 32세의 나도, 33세의 나도 얼마나 유치한 인간이었던지. 불과 1년 전의 나를 유치하고 철없다는 투로 바라볼 수 있는 이 느낌,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에서 더할 나위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나는 아직 자라고 있구나, 아직도 작년의 나를 경멸하는 것이 가능하구나, 그 사실이 실로 나를 기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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